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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헌혈 이야기 건강

나이가 드니 몇 가지 병이 생기고 이제 헌혈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에 전화를 걸어 저를 헌혈부적격자로 분류해달라고 신청했습니다.

 제가 헌혈을 처음 시작한 것은 (아마도) 1982년이었을 겁니다. 대학 3학년 가을이나 겨울로 기억하는데 실습 중이던 병원 1층의 혈액은행 옆을 지나다가 'A형 혈액 급구', 'O형 혈액 급구' 등의 문구가 쓰인 것을 보고 첫 헌혈을 했습니다(알고 보니 그 문구는 그 뒤로도 혈액형만 바꾸어 가며 계속 걸려있었는데 병원 실습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제가 혈액을 정말 급히 구하는 것으로  오인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헌혈을 시작한데에는 어렸을 적부터 친구이고 자주 만나던 구홍덕이 10대일 때부터 헌혈을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은 영향이 큽니다.

 졸업한 후에도 헌혈은 이어져 대략 두어 달에 한 번씩 헌혈버스에서 헌혈을 했고 전공의를 마칠 때에는  횟수가 스무 번을 넘었습니다.  전공의를 마치고 군의관으로 복무할 때 춘천에 있는 혈액원에서 우리 부대에 단체헌혈을 받으러 왔습니다. 지휘관의 '많이 협조하라'는 지시로 많은 병사들이 헌혈을 자원(?)했는데 헌혈하는 간부는 없었습니다. 저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저는 서울에 다녀오면서 헌혈을 한지 한달도 되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에게 그런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혈액원 관계자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 헌혈을 몇 번 더 해서 횟수가 30회가 되니 '헌혈장 은장'과  부상으로 손목시계를 받았습니다. ( 손목시계에는 적십자 마크가 그려져 있었는데 큰 애가 중학생때까지 차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1990년대 초반까지 헌혈을 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헌혈을 하지 않다가 2008년인지 2009년에 불현듯 헌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은평구의 어느 헌혈의 집을 찾았더니 제가 '헌혈부적격자'로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이유가 '간염' 때문이라고 했는데  저는 헌혈을 하는 과정에 간염이라는 통보를 받은 적도 없고 그 뒤로도 간염을 앓은 적이 없었습니다.(그렇게 등록된 이유로 짐작되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니...) 그래서 혈액검사를 하고 다시 헌혈을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전혈을 헌혈했지만 이제는 시간을 내서 성분헌혈로 혈소판과 혈장을 공여하니 헌혈의 집에 다니는 빈도가 잦아져 직원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눌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헌혈횟수가 50회, 100회를 넘겨 '현혈장 금장', '헌혈장 명예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만 60세가 되니 이제 혈소판 헌혈은 하지 못한다 하여 혈액원 직원에게 전혈과 혈장 중 어떤 것이 혈액원에 더 필요한지 물었습니다. 그 분의 권유에 따라 전혈 헌혈을 몇 년 하다가 올해 1월을 마지막으로 이제 헌혈을 접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이런 저런 병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헌혈을 하면서 헌혈 때문에 몸에 특별히 나쁜 일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헌혈을 다시 시작한 것과 제가 달리기를 열심히 한 기간이 겹치는데 헌혈이 달리기에 방해가 되거나 체력을 떨어뜨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헌혈하러 갔다가 이상 판정을 받은 적이 두 번 있는데 그 중 한 번은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고 그날 오후에 헌혈하러 간 날이었습니다. 혈액검사상 백혈구 수치가 10,300으로 나왔습니다. 마라톤 풀코스는 상당한 염증반응을 수반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한 번은 자전거 국토종주를 한 후였는데 헤모글로빈이 11.1g/dL이었습니다(장년 남자가 빈혈이 생겼으니 기함할 노릇이라 이런 저런 검사를 받았는데 철결핍성빈혈이었고 소화관을 통한 혈액손실은 없는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헌혈과 운동이 복합적으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제 경험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반복적인 헌혈은 전혈구수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헌혈을 하지 않는 요즈음 저의 헤모글로빈은 15.x입니다.  헌혈을 할 때에는 13.x였습니다. 헌혈을 반복적으로 할 때에는 헤모글로빈이 2.0g/dL 정도 낮아지는 것 같습니다. 언듯 생각하면 조금 이상하지만 적혈구를 더 많이 뽑는 전혈을 공여할 때(1년 5회까지 가능)보다 혈소판과 혈장을 헌혈할 때(1년 20회까지 가능)에 헤모글로빈에 미치는 영향이 커 보입니다. 후자가 적혈구 손실은 훨씬 적은 데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마라톤 풀코스도 달리고 지리산 당일 화대종주도 했으니 여가시간에 즐기는 운동능력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지적 능력에 미치는 영향은 자신할 수 없습니다. ㅎㅎ).
       
 헌혈을 완전히 마치면서 정리삼아 적었습니다.
 
* 처음 올린 날 : 2022년 11월 9일
  마지막 고친 날 : 2022일 11월 21일

병을 치료하려고 사람의 살을 먹던 풍습 기타

조선의 민간에서는 고질 불치병에 "사람의 살"을 쓰는 풍습이 존재했다. 안맹과 함께 대표적 독질로 분류된 나병의 경우 "사람의 생간을 먹으면 낫는다"고 하여 아이를 살해하는 일이 흔히 벌어졌으며, 이런 전통은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병이 불치이기 때문에 극단적 치료약을 구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연히 조선사회에서는 살인하여 신체의 일부분을 먹는 것을 금기시 했으며, 관에서도 이를 엄격히 다스렸다.

하지만 신체 일부를 잘라내는 행위, 곧 손가락을 깨물어 잘라 환자에게 피를 먹이는 행위와 엉덩이 살을 베어 약으로 쓰는 일은 금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여자의 경우 죽은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을 정절을 지키는 행위로 칭송했다. 조선 초 국가에서 펴낸 『삼강행실도』나 이후 여러 종류의 행실도 책에서는 이런 행위를 효자와 열녀의 모범적 행위로 수록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음을 막으려는 자식의 갸륵한 정성이나, 남편을 따라 세상을 등질만큼 깊고 깊은 사랑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전혀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그것이 효자와 열녀상으로 칭송되고 조장되는 순간, 그것은 따라야 할 일상적 규범이 되어버린다. 그런 일은 수없이 벌어지고 관에서는 일일이 효성비와 열녀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린다. 심지어 그런 일이 사회적으로 강요되었다. 이러한 단지효양(斷指孝養), 할고효양(割股孝養)과 순절(殉節) 전통에 대해 정약용은 유학의 본뜻에 어긋난 것이라 하여 맹렬하게 비판했다. (『여유당전서』 제1집 「효자론」과 「열녀론」)

*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신동원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2004) 169쪽 - 170쪽

매독이 우리나라에 전국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양란때였다. 아마도 이때 일인들을 통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왔거나 아니면 다시 전파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전쟁은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파괴하며 성행위의 문란을 초래하기 쉽다는 것은 이미 동서고금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인 사학자들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후 이 악병을 치료하기 위해 어린이들의 간담을 약용으로 쓰려는 해괴한 풍습이 나돌아 어린이들이 마음놓고 향리에서 돌아다닐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선조실록>에도 나온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되지 않은 선조 40년 정미(1607년) 5월에 기록된 실록의 내용을 보면 사람의 간담을 빼앗아간다는 소문이 중외로 퍼져서 이를 신고하는 사람이나 붙잡은 사람은 중상(重賞)을 내리게 했다고 한다.

물론 이와 같은 난병치료를 위한 간담약용의 얘기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흔히 누구나 기억하듯이 <삼국지연의> 중에도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아내의 인육으로 반찬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듯이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효자라면 부모의 난치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이른바 할고행효(割股行孝)가 있었고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실제로 부모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부모를 소생시킨다는 단지효양(斷指孝養)이 효자의 본보기같이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그후 이러한 악창 내지 음창 유행에 따른 미신적 치료법으로 살인식담(殺人食膽)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 관련해서 오래도록 실록은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선조 이전의 <명종실록>은 물론 조선조 말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피해와 관련해서 많은 기록이 나온다.

* 에세이 한국의학사(허정 지음. 한울 간. 1992) 120쪽 - 121쪽에서 옮김

** 난치병을 앓는 병자들이 치료를 위해 어린 아이의 간을 빼어 먹는다는 이야기가 20세기 중반까지도 우리나라에 있었습니다. 그런 병자들이 모여 사는 곳은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이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 글을 보면 그와 관련된 소문은 일찌기 17세기에도 있었고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에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 일과 관련된 병은 모두 몸의 형태를 크게 바꾸어 겉모습이 달라지고, 만성이며, (당시에는) 불치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 병의 치료가 가능해지면서 사람의 신체를 먹어 병을 치료하려는 사람은 이제 없고 소문도 사라졌고 이야기로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손문과 한방, 인삼 건강

손중산孫中山, 쑨원 선생은 간암에 걸렸다. 셰허協和병원이 병에 대해 속수무책이라고 알렸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한약을 복용하길 원치 않았다. 노신魯迅, 루쉰은 이에 대해 매우 감동하며 "그 당시 신문의 연재뉴스로 이 기사가 게재되었다. 이 기사들은 일생을 통한 그의 혁명사업 못지 않게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듣건대, 서양의사가 이미 속수무책이라고 했을 때, 누군가 한약을 복용하자고 말했지만, 중산 선생은 이를 찬성하지 않았다. 한약이 물론 효과가 있을 수 있겠지만 진단診斷적인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 진단할 수 없는데, 어떻게 약을 쓰겠는가? 복용할 필요 없다. 사람은 임종에 이르게 되면, 대체적으로 무엇에든지 기대려고 하지만 그는 자기의 생명에 대해서 이러한 분명한 지혜와 확고한 뜻을 갖고 있다"라고 썼다. (쉬광핑許廣平이 중산선생 서거 일주년을 맞아 쓴 글, <집외집습유集外集拾遺>>)

* 한의학에 작별을 고하다(I) (장궁야오 저. 박혜은 역. 전남대학교출판부 간. 2015) 21쪽

인삼은 외국인 의사들이 예측한 것보다 훨씬 오래 그가 생명을 연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외국 의사들이 손문을 포기한 뒤 손문의 추종자들은 중국 의사를 부를 것을 설득했지만 손문은 거절했다. 하지만 2주 전 손문은 저명한 중국 의사인 육중안을 부르는 데 동의했다. 육 씨는 중국 의학의 권위자로, 신문에 한두 달 정도 암을 고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광고했던 자다. 육 씨는 주로 인삼을 이용한 음료를 처방했다. 꽤 많은 양의 인삼을 복용한 후 손문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멀쩡한 상태로 친구들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인삼으로 북돋운 생명은 점차 가라앉았다. 그것이 바로 자극을 위한 모든 노력에 반反했다는 증거다.
- "Ginseng's Effect on Dr. Sun: Remarkable Results Claimed for It as Tonic But No Lasting Cure" The North China Herald and Supreme Court & Consular Gazette, 28 Mar. 1925.

* 인삼의 세계사(설혜심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2020) 356쪽

처음 올린 날 : 2022년 7월 27일

무당이 되는 두 가지 방법 기타

인간과 신의 사이에서 사람들의 문제를 신에게 호소하고, 신의 해답을 사람들에게 되돌려 줌으로써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이들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주술사(呪術師)라 하기도 하고, 샤만(shaman)이라 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무당이라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전라도 지방에서는 무당 대신 '당골' 또는 '당골네'라고 부른다. '당골네'는 '당골'에 여성을 나타내는 접미사 '-'-'-네'가 붙은 것으로서 여자 무당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골은 무당과는 그 출발이 다르다. 대체로 한강 이북 지역에서 말하는 무당은 신이 내려 무당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병(巫病)을 앓게 되고, 이 무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특정 무당에게 찾아가 내림굿을 받음으로써 할 수 없이 무당이 되는 것이다. 이런 무당을 강신무(降神巫)라 하거니와, 강신무는 신이 내린 사람이기에 신통력이 있고, 신과의 대화가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반면 전라도 지역의 '당골'은 신이 내린 무당이 아니다. 당골은 대대로 당골 집안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므로, 흔히 세습무(世襲巫)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당골인 탓에 자식이 대를 이어 당골이 된 것이다. 이런 당골은 신이 내리지 않은 탓에 신통력은 강신무만큼 강하지 않다. 반면 집안 대대로 당골의 전통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굿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나 춤 등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전라도의 대표적인 음악인 판소리의 기원을 무악(巫樂)이나 무가(巫歌)로부터 발달한 것으로 보는 이가 많은데, 판소리를 잘하는 소리꾼 가운데 당골 집안 출신들이 적지 않은 것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당골은 굿을 통해 한 집안이나 개인의 액을 풀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다. 그래서 당골은 일정 지역을 자신의 독점 권역으로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당골판 내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당골을 찾아가서 집안의 문제를 하소연하거나 해결을 부탁할 수 있었다. 이런 탓에 전라도 무당을 가리키는 '당골'과 표준어의 '단골'을 같은 어원에서 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정해 놓고 거래를 하는 집이나 사람을 흔히 '단골'이라 부르는데, 이 '단골'이 바로 당골판 사람들이 즐겨 찾는 '당골' 무당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당골판은 그 자손들에게 세습되는 것이 보통이다. 마치 요새 문제가 되는, 목사가 자신이 세운 교회를 자식들에게 세습하는 풍조처럼, 전라도의 당골들은 자신의 당골판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이런 세습 과정을 통해 당골들은 비교적 안정된 경제적 지위를 누리면서 일정한 수준의 무악이나 무가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전라도의 말과 문화(이기갑 지음. 지식과교양 간. 2013) 77쪽 - 78쪽

현대적 의미의 무당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만 살펴보기로 하자.

신병이란 말을 들어보았는가? 접신의 자질이 있는 사람은 귀신들이 귀신같이 알아보고 몰려들기 때문에 신병에 걸린다. 이유 없이 몸이 아프고, 헛것이 보이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 병원을 찾으면, 병원에서는 제대로 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해 "경과를 지켜봅시다" 따위의 말만 할 때가 있다. 증세가 점점 심해지면 집안 어르신이 용하다는 무당을 알려주고, 반신반의하며 무당을 찾아가면 무당은 환자의 얼굴만 홱 보더니 "신병이야, 신병. 신을 받아야 나올 수 있어"하며 혀를 찬다.

신병을 낫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내림굿을 통해 신내림을 받는다. 단, 신내림을 받았으므로 무조건 무당이 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누름굿이다. 몸에 든 신보다 더 강한 신을 불러와 몸에 든 신의 기운을 눌러 병세를 완화시킨다. 하지만 누름굿은 무당과 몸에 든 신의 레벨에 따라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결국 선택해야 한다. 계속 아플 것인가, 무당이 될 것인가.

이런 설명을 들으면 코웃음 칠 사람도 있겠지만, 신병은 엄연히 실존한다. 신은 없을지 모르지만 종교가 존재하듯이, 실제로 몸에 신이 들었는지와 무관하게, 신병은 존재한다. 정신의학에서는 신병과 화병(화가 난 시어머니가 머리에 흰색 띠를 두르게 한다는 그 병)을 한국 문화의 고유 장애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한국 문화의 독창성을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대부분 문화권(특히 주류 문화권이 아닌 3세계 지역)에는 한두 개 정도의 독특한 질병이 있다. 미국정신의학회의 정신 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 4판까지는 신병과 화병을 하나의 독창적인 병으로 분류 했으나, 5판부터 신병은 해리성 장애와 조현병으로, 화병은 스트레스성 신체장애로 분류한다.

신병이든 화병이든 주로 여성이 걸리는데, 가부장 문화가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여성 억압적인 문화가 해리성 장애로 나타나 신병을 겪거나, 화병 같은 스트레스성 신체장애로 나타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과학적으로 이해해보려는 노력이다. 이유야 어떻든 신병을 앓는 환자가 존재하고, 무당이 되는 이도 존재한다. 무당들은 자신이 신을 받았다고 믿는다. 이것은 사실은 아닐지 몰라도 거짓은 아니다.

하지만 신병과 내림굿으로 무당이 되는 것이 전통적 방식은 아니다. 과거에는 그 형태가 달랐다. 농경 사회에서는 공동체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을마다 만신(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이 있었다. 마을에 헛소리를 하거나 영적 능력이 특별한 아이가 있으면, 사람들은 무당이나 법사 같은 신통력이 있는 자에게 데려가 검사를 받게 했다. 만약 아이가 신가물(무당이 될 능력이 있는 사람)로 판단되면 만신에게 보낸다. 그러면 만신이 아이가 신을 받을 수 있게 돕는다.

하지만 신은 누군가가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까지는 그 아이가 신내림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아이는 마을을 돌며 걸립(일종의 구걸)을 하는데, 이를 통해 마을 사람들에게 얼굴을 알린다. 주로 쇠 걸립을 하는데, 이때 마을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생전에 썼던 물건이나 집안에서 오래 사용해 귀신이 들었을 것 같은 물건 중 쇠로 만들어진 것을 내놓는다. 이 쇠를 녹여 아이가 무당이 됐을 때 사용할 무구를 만든다. 내림굿을 하고 제자가 된 무당은 최소 1년 이상 무당 교육을 받는다. 이렇게 일종의 사제 관계를 맺으며 대를 잇듯 무당도 이어진다.

진짜 신기가 있는 이가 무당이 되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무당'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사회를 안정적으로 만드는 일종의 보험 역할을 한다. 공동체의 일원 중에서 그중 일부는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신경이 예민해 집단생활이 어려울 수 있다. 이런 이에게 무당 역할을 맡겨 사회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도 먹고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 무당들은 주로 조상신을 모셨다. 한 성씨가 함께 살았으므로 조상신을 모시면 단합에 도움이 됐다. 클럽이나 콘서트 같은 문화가 없던 과거에는 굿이 하나의 페스티벌이었다. 풍년을 빌거나 바다를 잠재우는 대규모 곳에 모두가 참여해 공동체 생활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억눌린 한을 춤추고 소리치며 풀었다. 굿을 하면서 내뱉는 말이나 행동은 이후 모두 용서받으므로, 굿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해방구 역할을 했다.

이런 문화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조금씩 사라진다. 일본은 전국적으로 미신타파 운동을 벌였는데, 순사들이 굿을 하는 장소를 덮쳐 무당을 잡아갔다. 하지만 이런 탄압이 오히려 민중을 결속시켜 무속을 강화했다. 원래 무언가를 외부에서 탄압하면 반대의 효과가 난다. 일제의 탄압도 버틴 무속 문화가 사라진 결정적 계기는 박정희 정권에서 벌인 새마을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을 도시처럼 개발하자는 것이었고, 이 과정에서 무속 역시 많은 탄압을 받았다. 일제의 강압 때와는 달리 자체적으로 농촌을 바꿔보자는 움직임이 있을 때라, 꽤 많은 마을에서 만신이 사라졌다.

하지만 탄압이 없었다 해도 과거의 시스템은 오래가지 못 했을 것이다. 시골에서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지역 공동체가 와해됐고, 무당도 각자 살길을 찾아야 했다. 무당들이 여기저기 떠돌게 되면서, 시스템이 아니라 신병에 걸린 사람이 알아서 무당을 찾고 내림굿을 받는 지금의 방식이 자리 잡는다.

과거 씨족사회에서는 보통 조상신을 모셨다. 하지만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다양한 신이 등장한다. 신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므로 어떤 신을 모시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과거에도 미륵이나 사천왕, 원통하게 죽은 장수나 왕을 모시는 무당들이 있었다. 하지만 농촌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신들이 더욱 다양해졌다. 이제 조상신을 모시는 무당은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는 흘러가니 새로운 신도 등장한다. 심지어 맥아더를 모시는 무당도 있다(미친 전쟁광의 영혼이 들어와 봐야 "다 때려 부숴"라는 충고밖에 못 해줄 것 같지만). 혹시 다음에 무당집에 가볼 일이 생긴다면 뒤에 모시는 신들을 자세히 보라. 옥황상제, 관우장군, 부처, 미륵, 동자승, 사천왕, 삼신할머니, 호랑이까지 전혀 맥락 없는 신이 함께 있다(그런데 단군신화에서 곰이 이긴 거 아냐?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호랑이를 더 좋아하는 거야?).

* 믿습니까 믿습니다(오후 지음. 동아시아 펴냄. 2021) 156쪽 - 161쪽

처음 올린 날 : 2022년 7월 26일

동성애에 대한 인용 글 의료 의학

대부분의 그리스 사람들은 또한 남성성의 필수요소는 여성에게만 성적으로 끌리고 성관계도 여성하고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것을 문화적 편견이 아니라 생물학적 진실로 간주한다. 성별이 다른 두 사람의 관계는 자연스럽지만 성별이 같은 두 사람의 관계는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대자연은 남자끼리 서로 성적으로 끌리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아들이 옆집 소년과 성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서 소동을 일으키는 것은 오로지 특정 문화에 깊이 물든 인간 엄마뿐이다. 사실 엄마의 분노도 생물학적 필연은 아니다. 적잖은 인간 문화들이 동성애가 합법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건설적이라고 보았고, 그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바로 고대 그리스였다. 《일리아스》에는 아킬레스가 파트로클로스와 동성애 관계를 맺는 데 대해 엄마인 테티스가 반대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마케도니아의 올림피아스 여왕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개성이 강하고 단호한 여성의 하나로 꼽힌다. 남편인 필리포스의 암살을 사주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저녁을 같이하려고 연인인 헤파이스티온을 집에 데려왔을 때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단지 사람들이 생물학적 신화를 통해 정당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양자를 구분하기 좋은 경험법칙이 있는데, '자연은 가능하게 하고 문화는 금지한다'는 기준이다. 생물학은 매우 폭넓은 가능성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사람들에게 어떤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강제하고 다른 가능성을 금지하는 장본인은 바로 문화다. 생물학은 여성들에게 아이를 낳는 능력을 주었고, 일부 문화는 여성들에게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을 의무로 지웠다. 생물학은 남자들끼리 성관계를 즐길 수 있게 했고, 일부 문화는 그런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을 금지했다.

문화는 자신이 오로지 부자연스러운 것만 금지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지만,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실 부자연스러운 것이란 없다. 가능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말로 부자연스러운 행동,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행동은 아예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금지할 필요가 없다. 수고롭게시리 남자에게 광합성을 금지하거나, 여자에게 빛보다 빨리 달리지 못하게 하거나, 음전하를 띤 전자가 서로에게 끌리지 못하도록 금지한 문화는 하나도 없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이라는 우리의 관념은 생물학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에서 온 것이다. '자연스러움'이란 말의 신학적 의미는 '자연을 창조한 신의 뜻에 맞는다'는 뜻이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이 인간의 몸을 창조할 때 사지와 장기가 특정 목적을 수행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사지와 장기를 신이 마음에 그렸던 목적에 맞게 사용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활동이고, 신의 의도와 다르게 사용한다면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진화에는 목적이 없다. 장기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진화한 것이 아니며, 그 사용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인체의 장기 중에 그것이 원형 상태로 수억 년 전 처음 등장했을 때 했던 일만을 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장기는 특정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진화하지만, 일단 존재하게 되면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방향으로도 적응할 수 있다. 가령 입이 등장한 것은 가장 초기의 다세포 생명체가 영양소를 몸 안으로 섭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고, 우리는 지금도 그런 용도로 입을 사용하지만, 동시에 키스하고 말하는 데도 사용한다. 람보라면 수류탄 핀을 뽑을 때도 써먹는다. 이런 용도 중 어느 하나라도 부자연스러운 것이 있을까? 벌레 비슷하게 생겼던 6억 년 전의 우리 선조가 입으로 하지 않던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찬가지로 날개도 처음부터 모든 공기역학적 장점들을 갖추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원래 다른 목적으로 쓰였던 기관에서 발달했다. 한 이론에 따르면, 곤충의 날개는 날지 못하는 벌레의 신체에서 돌출한 부위로부터 수백만 년 전 진화했다. 튀어나온 혹이 있는 벌레는 신체 표면적이 더 넓었고, 덕분에 햇빛을 더 많이 흡수해서 체온을 따스하게 유지할 수 있다. 진화가 서서히 진행되면서 태양광 히터는 점점 더 커졌다. 햇빛을 최대로 흡수할 수 있는 구조-표면적이 넓고 무게가 덜 나가는 구조-는 우연히 다른 능력도 주었다. 달리고 점프할 때 약간 떠오르는 능력이었다. 돌출부위가 더 큰 벌레는 더 멀리 뛰고 점프할 수 있었다. 어떤 곤충들은 이 부위를 이용해서 활강하기 시작했고, 여기서 약간의 단계만 더 거치면 실제로 공기를 헤치고 날게 해주는 날개가 된다. 다음번에 모기가 당신 귀 근처에서 앵앵거린다면 모기에게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행위라고 비난해보라. 만일 그 모기가 하느님이 자신에게 준 것에 만족하는 착한 모기라면 날개는 태양광 집열기로만 쓸 테니까.

인간의 성기와 성행위에도 똑같은 멀티태스킹이 적용된다. 성관계는 당초 출산을 위해 진화했고, 구애행위는 잠재적 짝의 적응도를 측정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진화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동물이 이 두 가지를 다양한 사회적 목적들에 이용한다. 자신의 작은 복사본을 만드는 것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목적들이다. 예컨대 침팬지는 정치적 유대를 강화하고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긴장을 완화하는데 성관계를 이용한다. 이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인가?

* 사피엔스(유발 하라리 지음. 조병욱 옮김. 김영사 펴냄. 2015) 215쪽 - 218쪽

사회적 비판이 날로 증가하는 가운데, 과거에는 질병으로 여겨졌던 상태들 중 일부가 정상의 변이로 편입되었는데 동성애도 그 중의 하나이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동성애를 인정했다. 그러나 유대 기독교 문화에서 동성애는 죄악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더 확대하면 범죄가 되었다. 19세기 말 동성애는 도덕적 금기(법률적 금기는 아니었지만)의 영역을 벗어났고, 리처드 폰 크라프트에빙(Richard von Krafft-Ebing)과 헨리 해블록 엘리스(Henry Havelock Ellis)에 의해 질병으로 재구성되었다. 필자가 의과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만 해도 동성애는 질병이라는 것이 사회 통념이었지만 의사들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동성애가 질병이라면 당연히 치료가 필요한 것이고 만일 치료 방법이 없다면 연구에 착수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동성애는 생명을 위협하는 것도 아니고 '치료'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뿐더러 치료를 원하는 '환자'들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동성애자들은 사회의 불관용이 치료되기를 소망했다.

생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불치의 상태'를 처리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것이 병이 아니라고 결정하는 것이다. 동성애는 1973년 대부분 남성이자 백인이며 이성애자들로 구성된 정신과 의사들의 표결을 거쳐 DSM에서 빠졌는데, 만장일치는 아니었다. 이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동성애는 정상의 변이로 인식되고 있다. 문화적 조류와 사회 정치적 분위기가 이 같은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어떤 상태가 질병인가 아닌가를 고학력 중상층 전문가들의 표결로 결정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신체 질환의 진단도 이렇게 결정되는가? 그렇지는 않더라도 신체 질환의 경우 당초 질병의 정의에 어떤 보편적 동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맹장염, 당뇨, 백혈병, 간질, 암, 관절염에 대해 표결을 한 적이 있는가? 정신 의학 고유의 특성과 문화적 주관성을 인식한다면 이런 식의 표결은 거부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 의학의 역사(재컬린 더핀 지음. 신좌섭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2006) 437쪽 - 438쪽

우리 역사에는 유대기독교문화화는 전혀 상관 없는 조선 세종 때에 동성애를 처벌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에서 동성애를 금한 근거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집니다. 기회가 되면 찾아봐야겠습니다.

처음 올린 날: 2022년 7월 25일
마지막 고친 날 : 2022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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